Quantcast
Channel: 日本人の進路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3630

韓国の歴史教科書を読む(2/2)

$
0
0

韓国の歴史教科書を読む(2/2)







    はじめにクリックをお願いします 
人気ブログランキングへ














韓国の捏造歴史認識に同調しろ!
=日本も韓国の言う嘘の歴史を認めろ!


(クリックで拡大)


韓国の歴史ねつ造01










(クリックで拡大)



反日104









(クリックで拡大)



反日101






(クリックで拡大)



反日102








(クリックで拡大)



反日103






















****************************






樹 懶 庵(じゅらいあん) より
http://www7.plala.or.jp/juraian/index.html



韓国の歴史教科書を読む 
http://www7.plala.or.jp/juraian/ktextbook.htm





韓国の歴史教科書を読む




 (続き) 











江華島条約 

 この教科書は日朝間で締結された江華島条約(1876)が最も悪質な不平等条約だったと暗示している。本文では米朝修好通商条約にかこつけて、次の記述がある。

조ㆍ미 수호 통상 조약도 강화도 조약과 같이 불평등한 조약으로, 영사 재판에 의하 치외 법권은 물론 최혜국 대우까지 규정되어 있었다. 다만 강화도 조약과 달리 비율은 낮지만 수출입 상품에 대한 관세 조항이 들어 있었다.(p. 52)
米朝修好通商条約も江華島条約と同じく不平等な条約で、領事裁判による治外法権はもちろん最恵国待遇まで規定されていた。しかし江華島条約と異なり、比率は低いが輸出入商品に対する関税条項が入っていた。
 



 また51ページには「江華島条約、なぜ不平等条約なのか?」という項目があり、「江華島条約を日本と中国が西欧列強と結んだ通商条約と比較してみよう」とある。そして資料として江華島条約と日米修好通商条約(1858)、南京条約(1842)の抜粋が掲載され、課題3として「資料1~3を参考に江華島条約が他の条約に比べ特に不利な内容があるか探してみよう」とある。資料1にわざわざ日本貨幣の流通を定めた日朝修好条規付録第7条を付加したことから、この点を指していることは明らか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はっきりと「江華島条約が最も悪質だった」とは書かなかったのは、即座に反論される恐れがあるからだろう。代案教科書によると、朝清商民水陸貿易章程(1882)はさらに不平等で、朝鮮が清の属邦であることを明記した上、清商人の内陸進出を許容し、清国人はもちろん清国人と関係した朝鮮人の裁判にも治外法権が適用された。こうした点を隠し、即座に反論されないよう暗示によって高校生をだますやり方は、姑息なことこの上ない。 





用語の差別化

 清はロシアは何をやろうが単なる「内政干渉」にとどまるのに、日本は常に侵略と表現される用語上の差別は、この教科書にも見られる。

그러나 이러한 개력은 일본의 침략을 수반하고 있어 척사 유생과 많은 백성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p. 56)
しかしこうした改革は日本の侵略を随伴しており、斥邪儒生と多くの民衆の反発を呼び起こした。

갑신정변 이후 청은 여세를 몰아 더욱 노골적으로 내정 간섭을 하였다. 일본도 침략의 발판을 잃지 않기 위해 청과 담판하여 조선에서 청ㆍ일 양국 군대가 모두 철수할 것과 앞으로 조선에 군대를 파병할 경우에는 서러 통고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텐진 조약을 맺었다(1885). (p. 69)
甲申政変以後清は余勢を駆ってさらに露骨に内政干渉をした。日本も侵略の足場を失わないために清と談判し、朝鮮から清・日両国の軍隊がすべて撤収することと、前もって朝鮮に軍隊を派兵する場合には互いに通告することを内容とする天津条約を結んだ(1885)。

그러나 아관 파천이후 조선 정부는 러시아의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p. 84)
しかし俄館播遷以後朝鮮政府はロシアの干渉を受けざるを得なかった。
 





テロ礼賛 

 この教科書は日清戦争終結(1895)から日韓併合(1910)までの抗日ゲリラ活動に6ページを割いて詳述している。その上で次の「よく頑張った史観」を提示しているが、根拠不明である。代案教科書によると、日露戦争後日本では併合を主張する軍部と、併合に反対の統監府が対立しており、これが時間を費やした理由とされる。

일제가 을사조약 강제 체결 후 대한 제국을 완전히 병합하기까지 5년이나 걸린 데는 의병 항쟁도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p. 94)
日帝が乙巳条約の強制締結後大韓帝国を完全に併合するまで5年もかかったのは義兵抗争も大きな要因として作用した。


 この単元では、資料として金海山『陣中日記』からの抜粋がある。倭奴ウェノムを連発する勇ましい檄文で、面白いので全文引用する。
 


왜놈에게 붙은 놈들은 들어라
그 놈들이 필경 악독하여 면장과 동장을 잡아가서 왜놈들에게 붙어 가난한 부락에다 수천 금의 돈을 배정해 거두어 갔으니 …… 하늘의 도란 원래 올바른 것이나 어찌 끝내 그 무리들만 영구히 잘 지내게 하고 의병과 민간에게는 종시 원수를 갚을 날이 없게 하겠느냐. … … 아! 우리 정부에는 대신의 직책을 가진 자들이 왜놈에게 붙어서 나라를 좀먹고 있으니 더러운 자들이라 기대할 것조차 없거니와, 소위 세무를 영수하는 면장의 무리들은 우리와 같은 민간인으로서 …… 아! 네놈들은 어찌 금수가 되려 하느냐. 무릇 왜놈을 받드는 일이라면 조금도 기탄없이 달갑게 노예가 되고 왜놈의 명령이라면 엄하게 지키기를 우리 임금의 명령보다 더하며, 민생의 재물을 빼앗기를 성화보다 빨리하여 제 임금을 배반하고 왜놈에게 충성하며 제 아비를 버리고 왜놈에게 공경하며 충성과 효도의 명예를 얻으려는 것이 네놈들이 아니고 누구란 말이냐 (p. 93)
倭奴ウェノムに従う奴らは聞け
畢竟あいつら[親日派官僚]が悪辣で、面長と洞長を捕えて行き、倭奴どもに追従し、貧しい部落に数千金のカネをばらまいて納めさせたが……天の道は元来正しいはずなのに、なぜ結局あいつらだけが永久に安楽に暮し、義兵と民間にはいつも怨讐を晴らす日を失わせるのか。 ……ああ!わが政府には大臣の職責を担う者どもが倭奴に従い、国を食いものにしている。汚い奴らだから期待することさえないが、いわゆる税務を遂行する面長などはわれわれと同じ民間人なのに……ああ!貴様らはなぜ禽獣になろうとするのか。よそ者の倭奴を敬うこと少しの忌憚もなく喜んで奴隷となり、倭奴の命令なら厳格に従うことわが主君の命令より厳格にして、民生の財物を奪うこと流星のごとく迅速で、わが主君を裏切り倭奴に忠誠を尽くし、実の親を捨て倭奴に恭敬し、忠誠と孝道の名誉を得ようとするのが貴様らでなくて誰だというのか。
 



 また、上海における尹奉吉のテロ(1932)については、日本人を殺すことに成功したのがいかにも痛快そうである。

윤봉길이 던진 폭탄은 사리카와 대장 등 단상에 있던 많은 일본군 장성과 고관들을 죽이거나 부상을 입혔다. 이 의거로 전승 축하 식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되었다. (p. 188)
尹奉吉が投げた爆弾は、白川大将ら壇上にいた多くの日本軍将官と高官を殺したり負傷を負わせた。この義挙で戦勝祝賀式場はあっという間に阿鼻叫喚になった。
 






収奪史観

 収奪史観の大原則は、いかなる日本の政策も肯定的に評価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である。したがって3.1運動以後の文化政治への転換も、次のように記述される。

그러나 이것은 조선인의 불만을 달래려는 일제의 기만적인 술책이었다. (p. 152)
しかしこれは朝鮮人の不満をなだめようとする日帝の欺瞞的な術策だった。


 つまり総督府がどんな政策を採ろうが、その悪辣な意図だけが非難され、結果が公平に評価されることはない。

일제는 식민지 생산력을 높여 더욱 효과적으로 수탈을 할 목적으로 산업 박람회를 열었다. (p. 204)
日帝は植民地生産力を高め、さらに効果的に収奪をする目的で、産業博覧会を開いた。
 



 土地調査事業も、「日帝の悪辣な収奪」を強調する方向で記述される。総督府の宣伝が虚偽だったというなら、税制が以前より不公正になり、所有権が以前より保護されず、生産力が低下したことを示すべきだろう。代案教科書は具体的な数字をあげ、無申告地として国有地に編入された土地は0.05%だったとしたが、この教科書にはそうした定量的記述が全くない。

조선 총독부는 병합 직후 임시 토지 조사국을 설치한데 이어 1912년에는 '토지 조사령'을 공포하여 본격적으로 토지 조사 사업에 나섰다. 일제는 이 사업이 지세를 공정히 하고, 토지 소유권을 보호하며, 토지의 생산력을 높이는 것이라고 선전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토지 소유권을 새로이 법적으로 확정하여 지세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또, 토지의 매매와 저당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일본인이 쉽게 토지에 투자할 수 있게 하였다. (p. 156) 


朝鮮総督府は併合直後、臨時土地調査局を設置したのに続き、1912年には「土地調査令」を公布して本格的に土地調査事業に乗り出した。日帝はこの事業が地税を公正にし、土地所有権を保護し、土地の生産力を高めるものだと宣伝した。しかし実際には土地所有権を新しく法的に確定し、地税を安定的に確保することにその目的があった。また、土地の売買と抵当を自由にすることで日本人がたやすく土地に投資できるようにした。

1918년에 토지 조사 사업이 끝났을 때 사실상 농민의 소유였던 많은 농토와 공공 기관에 속해 있던 토지, 마을 또는 집안의 고유지로 명의상의 주인을 내세우기 어려운 동중ㆍ문중 토지의 상당 부분이 조선 총독부의 소유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분쟁이 일어났지만, 그 해결은 일제에 유리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조선 총독부는 이렇게 빼앗을 토지를 동양 척식 주식 회사를 비롯한 식민 회사나 일본인에게 헐값으로 팔아 넘겼다. (p. 156)
1918年に土地調査事業が終わったとき、事実上農民の所有だった多くの農地と公共機関に属していた土地、村または宗族の固有地で名義上の持主を申し立て難い洞中・門中の土地の相当部分が朝鮮総督府の所有になった。この過程で多くの紛争が起きたが、その解決は日帝に有利な方向で進行された。朝鮮総督府はこのように奪った土地を、東洋拓殖株式会社をはじめとする植民会社や日本人に安値で売り渡した。
 



 米の輸出についても、日本が強権を発動して米を収奪して行ったかのような書き方になっている。

일제는 모자란 쌀을 조선에서 확보할 목적으로 산미 증식 계획을 세웠다. 토지와 수리 시설, 종자 등의 개량을 통해 식량 생산을 대폭 늘려 일본으로 더 많은 쌀을 가져가고, 우리 나라 농민의 생활도 안정시킨다는 것이 목표였다. 쌀 생산량은 어느 정도 늘어났으나. 원래의 계획대로 추진되지는 못하였다. 반면에, 일본으로 쌀의 반출량은 계속 늘어나 1934년에는 거의 목표량에 가깝게 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 내에서는 식량이 부족하여 만주에서 들여오는 잡곡 등으로 식량을 충당해 갔다. (p. 158)
日帝は足りない米を朝鮮で確保する目的で、産米増殖計画をたてた。土地と水利施設、種子等の改良を通じて食糧生産を大幅に増やし、日本にさらに多くの米を持って行き、わが国の農民の生活も安定させるというのが目標だった。米の生産量はある程度増えたが、本来の計画どおり推進されなかった。反面、日本へ米の搬出量は継続して増え、1934年にはほとんど目標量に近くなった。これによって朝鮮内では食糧が不足し、満州から持ち込んだ雑穀等で食糧を充当して行った。
 



 植民地としてはあり得ないほどの工業化については、それが奇形的に膨張した軍需工業で、産業間の格差を拡大したことを強調する。一方、それが当時の朝鮮人の生活をどの程度潤し、独立後の南北朝鮮の工業化にどの程度寄与したかはまったく言及されない。

이리하여 일본의 독점 자본은 조선 총독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군수 산업에 집중적으로 진출하여 이들 산업이 기형적으로 팽창하였다. 이 시기의 군수 산업은 주로 북부 지방에 집중 배치되었다. 1938년 무렵에는 공업 생상액이 농업 생산액보다 많아질 정도로 공업화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소비재 생산은 크게 줄어들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 공업화의 결과, 공업 발전의 지역적 편차는 물론이고, 농업과 공업, 경공업과 중공업 사이의 산업 간 불균형이 깊어졌다. (p. 160)
かくして日本の独占資本は、朝鮮総督府の支援を受けて軍需産業に集中的に進出し、これらの産業が奇形的に膨張した。この時期の軍需産業は、主に北部地方に集中配置された。1938年頃には、工業生上額が農業生産額より多くなる程度に工業化が進んだ。しかし消費財の生産は大きく減った。日帝による植民地工業化の結果、工業発展の地域的偏差はもちろん、農業と工業、軽工業と重工業間の産業間不均衡が大きくなった。
 



 さすがに近代化が起きたこと自体は否定できないが、それらは収奪史観の原則に従ってことごとく否定的に評価される。「日帝強占期、わが社会の変わったもの」という項目では、あらゆる近代化を否定する狂信的カルトのような言い方をしている。

이러한 변화는 모두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 것도 아니었으며, 우리 나라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진행되지도 않았다.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식민지 백성의 슬픔과 억압, 그리고 분노가 스며 있었다. (p. 224)
このような変化は皆肯定的に受け入れられたのでもなく、わが国の様々な地域で同時に進行したのでもなかった。このような変化の裏には植民地民の悲しみと抑圧、そして憤怒が染み込んでいた。
 



 この項では「変わり行くソウル」「交通の変化」「女性の生活の変化」「大衆文化の形成」が記述されるが、前三者はいずれも否定的な評価で締めくくられる。最後の大衆文化だけは「大衆文化は日本時代に形成された」という結論だが、日本時代を明るく描いた映画やドラマのヒットの影響かも知れない。

1920년대 말에 전기가 보급되자 서울의 밤거리도 달라졌다. 내온사인이 등장하여 거리를 밝히고 사람들을 유혹하였다. 네온으로 치장한 도시의 상점 진열장은 새로운 유행을 전파하였다. 그러나 이런 풍경 뒤에는 일제하 서민들의 고통스런 생활이 숨겨져 있었다. (p. 224)
1920年代末に電気が普及すると、ソウルの夜の街も変わった。ネオンサインが登場し、通りを明るくして人々を誘惑した。ネオンで治粧した都市の商店陳列場は新しい流行を伝えた。しかしこうした風景の背後には、日帝下の庶民たちの苦しい生活が隠されていた。
 


일제 시기, 택시 등의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도심에서는 점차 인력거가 밀려나고, 소를 이용한 수레가 사라져 갔다. 인력거에 매달려 살던 서민들은 자동차의 등장으로 생존권의 위협을 받고, 열차는 꿈과 희망과 동경보다는 식민지 백성의 상처로 남아서 우리들에게 서러움을 심어주었다. (p. 224)
日帝時期、タクシー等の自動車が登場して都心からは次第に人力車が駆逐され、牛を利用した車が消えて行った。人力車に頼って暮した庶民たちは、自動車の登場で生存権の脅威にさらされ、列車は夢と希望と憧憬よりは植民地民衆の傷跡として残り、われわれに悲しみを植え付けた。

여성들의 사회적 활동도 활발해져 갔다. 이러한 생활은 언론과 매스컴을 통해서 더욱 확산되어 갔다. 그러나 모든 여성들에게 적용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p. 225)
女性たちの社会的活動も活発になって行った。このような生活は、言論とマスコミを通じてさらに拡散して行った。しかしすべての女性たちに適用されたのではなかった。
 





感情的表現 

 この教科書には、教科書らしからぬエキセントリックで感情的な表現が見られる。慰安婦問題を「最も反倫理的」としたのも、最も感情に訴えやすいからだろう。また女子挺身隊のうち、本来の目的である労働力として徴用されたのはごく一部で、大部分は慰安婦だったと読めるような書き方をしている。

일제가 침략 전쟁을 수행하면서 행한 가장 반인륜적인 범죄 행위는 여성들을 전쟁에 강제 동원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임의로 조선 여성들을 동원하던 일제는 전쟁 막바지에 이르려 "여자 정신 근로령"을 만들고 이를 법제화하였다 (1944).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동원된 여성들 가운데 일부는 일본과 조선의 군수 공장에 보내져 강제 노역을 당하였고, 또 다른 여성들은 정장터로 보내져 일본군 "위안부"로 이용되었다. (p. 163)
日帝が侵略戦争を遂行しながら行った最も反倫理的な犯罪行為は、女性たちを戦争に強制動員したことだった。初めには任意に朝鮮女性たちを動員した日帝は、戦争末に至り「女子挺身勤労令」を作ってこれを法制化した(1944)。挺身隊という名で動員された女性たちのうち、一部は日本と朝鮮の軍需工場に送られ強制労役を強いられ、また他の女性たちは戦場に送られ日本軍「慰安婦」として利用された。
 



 3.1運動の描写では、特に大仰な表現が目立つ。

시위가 있는 곳에는 일본군의 무자비한 살육이 뒤따랐다. 전국 각지의 감옥은 만세 시위로 잡혀 온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화성 제암리를 비롯한 전국 곳곳에서 일본군의 학살 만행이 자행되었다. (p. 173)
示威がある所には日本軍の無慈悲な殺戮が後に続いた。全国各地の監獄は万歳示威で捕らえられて来た人々で一杯になり、華城堤安里をはじめ全国各地で日本軍の虐殺蛮行が恣行された。

3.1운동, 그 가운데에서도 유관순이 앞장 섰던 아우내 장터 만세 운동은 장렬하였다. 아직도 아우내 삼거리에는 그 날의 울부짖던 함성이 메아리치는 듯 싶다. (p. 180)
3.1 運動、その中でも柳寛順が先頭に立ったアウネ市場の万歳運動は壮烈だった。いまだにアウネの三叉路には、あの日の泣き叫ぶ喊声がこだまするようだ。
 



 在日朝鮮人や朝鮮語学会事件に対する記述も、いかにも左翼らしいエキセントリックな表現になっている。

그러나 주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경제적 수탈이 강화되자 생활 터전을 상실한 많은 농민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산업 노동자로 취업하였다. 이들은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일본인 자본가에게 착취당하였으며, 민족 차별로 온갖 수모를 당하였다. (p. 163)
しかし主権を喪失し日帝の経済的収奪が強化されると、生活基盤を喪失した多くの農民たちが日本に渡って産業労働者として就業した。これらは劣悪な労働環境で日本人資本家に搾取され、民族差別であらゆる侮蔑を受けた。

마침내 일제는 내란죄라는 터무니없는 죄를 꾸며 이들을 검사국으로 넘겼다. 재판에 넘겨진 사람들은 언제 열릴지도 모르는 재판을 기다리며 형무소의 고통스러운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가혹한 고문으로 이운재와 한징은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p. 230)
ついに日帝は内乱罪という途方もない罪をでっち上げ、これらを監査局に渡した。裁判にかけられた人々は、いつ開かれるとも知れない裁判を待ちながら、刑務所での苦しい生活を続けざるを得なかった。苛酷な拷問で、李允宰と韓澄は獄中で死亡した。
 






親日派糾弾 

 親日派糾弾は盧武鉉政権の目玉商品だった。そのせいもあってか、この教科書は親日派が現在も存続し、それを憎み続け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を教えている。

이에 앞서 1940년에는 이미 친일 언론으로 변질된 동아일보, 조선일보마저 강제 폐간하는 등 한글을 사용하는 모든 신문과 잡지를 없애버렸다. (p. 154)
これに先立ち、1940年にはすでに親日言論に変質していた東亜日報・朝鮮日報まで強制廃刊する等、ハングルを使用するすべての新聞と雑誌をなくした。

이들 가운데는 일제의 위협을 견디지 못하여 마지못해 이름만 내건 사람도 있었지만, 자발적으로 앞장서 참여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이든 이 같은 친일파의 준동은 우리 민족사의 오욕이자 민족 정신에 씻기 어려운 해악을 끼쳤다. (p. 164)
これらのうちには日帝の脅迫に耐えかねやむをえず名前だけ掲げた人もいたが、自発的に率先して参与した人も多かった。しかしどの場合であれこのような親日派の蠢動はわが民族史の汚辱であり、民族精神に容易に拭えない害悪を及ぼした。
 


친일 활동에는 이광수 등 문인은 물론 교육, 예술, 종교계의 저명 인사와 많은 지식인들이 가담하였다. (p. 229)
親日活動には李光洙等の文人はもちろん、教育・芸術・宗教界の著名人と多くの知識人たちが加わった。

그러나 일제 말기에 이르러 많은 종교 단체와 종교 지도자들이 친일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전시 동원 체제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일제 식민지 정책을 홍보하는 일은 물론이고, 일본군을 위문하거나 위문금 모금 행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p. 237)
しかし日帝末期に至ると多くの宗教団体と宗教指導者たちが親日活動に積極的に出て、戦時動員体制に参与した。これらは日帝植民地政策を弘報するのはもちろん、日本軍を慰問したり慰問金の募金行事を開いたりした。

1930년대 후반 일제의 전신 지배 체제가 본격화되자 많은 예술인들이 친일적인 예술 활동에 참여하였는 데, 이는 광복 이후 우리 예술계가 극복해야 할 과제가 되었다. (p. 240)
1930年代後半に日帝の精神支配体制が本格化すると、多くの芸術人たちが親日的な芸術活動に参与したが、これは光復以後わが芸術界が克服すべき課題となった。
 







植民史観の否定

 植民史観とは日本人による朝鮮史研究のうち韓国人が気に食わないもののことで、この教科書では「日鮮同祖論」「停滞性論」「党派性論」「他律性論」があげられている。ところが植民史観を正面から否定する根拠は示されず、それが日本人や親日派にどのように利用され、朝鮮社会にどのような悪影響を与えたかに集中している。これでは植民史観を否定する実証的根拠がないのではないかという疑念を学生に与えるだろう。実際その通りで、古代半島に対する倭の影響がなかったとか、19世紀朝鮮の経済的水準が日本より高かったとか、徳川幕府の党派争いが李氏朝鮮より酷かったとか、中国・モンゴル・満州等の影響がなかったとか実証することは不可能である。いわゆる植民史観の否定とは、民族主義的イデオロギーによって否定するよう要請されているにすぎない。

일선 동조론은 한민족의 독자성을 부정하고 일본의 조선 병합과 식민지 지배를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또한 1930년대 일본이 펼친 내선 일체(內鮮一体)의 근거로 이용되었다. (p. 242)
日鮮同祖論は韓民族の独自性を否定し、日本の朝鮮併合と植民地支配を当然のことと受け入れさせることに目的があった。また1930年代に日本が掲げた内鮮一体の根拠に利用された。
 


이러한 주장은 우리 나라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일본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침략 미화론으로 이어졌다. (p. 242)
このような主張[停滞性論]は、わが国の近代化のためには日本の役割が必要だという侵略美化論につながった。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조선 왕조가 당쟁으로 망했다든가 우리 민족은 파쟁 의식이 심하다는 주장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다. (p. 243)
いまだにわが社会の一角では、朝鮮王朝が党争で亡びたとか、わが民族は派争意識が甚だしいという主張を当然のものと受け入れる場合が多く見られる。

타율성론은 한민족의 성향이 적극적이고 자율적이 아니라 수동적이고 타율적이라고 몰아세우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이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를 내세우려는 데 목적이 있었다. (p. 243)
他律性論は、韓民族の性向が積極的・自律的ではなく受動的・他律的だと非難するものだった。これを通じて、わが民族が帝国主義時代に日本の支配を受けるのは当然という論理をたてようとすることに目的があった。
 





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ー


代案教科書・韓国近現代史

교과서포럼 지음, 대안 교과서 한국 근ㆍ현대사, 기파랑, 2008. 






韓国歴史教科書03






 代案教科書は金星出版社版をはじめとする近現代史教科書の親北左派史観に危機感を抱いた新右翼(ニューライト)が2008年3月に出版したもので、検定を通過した正式の教科書ではない。この教科書の柱のひとつは脱民族主義で、このため日本時代の明暗両面とも評価する植民地近代化論に立っている。これは韓国社会の基準からいえば、直ちに親日売国奴という非難を買うことになる。実際出版直後の社説では、ハンギョレや京郷新聞等の左派媒体に加え、中道派の中央日報も親日的として非難した。ただし保守派の朝鮮日報や東亜日報は、植民地近代化論は置いて北朝鮮礼賛が正されたことの方を評価し、支持を表明した。
 なお、2013年2月に大統領に就任した朴槿惠は、本書の出版記念会で「この本の出版こそ最も重要な意味があり、後日それ自体でもう一つの歴史と記録されると思う」「われわれが一層誇らしく新しい大韓民国の歴史を作っていくのに、この本が大きな土台になるだろう」と支持を表明した(聯合ニュース 2008年5月26日付)。したがって彼女が言う「正しい歴史認識」には、ニューライト的な親日史観が含まれると考えざるを得ない。
 責任編集者の李榮薰は植民地近代化論の代表走者として活躍中で、『大韓民国の物語』は文藝春秋から翻訳が出ている。これは朴枝香・金一榮・金哲・李榮薰編『解放前後史の再認識』の解説書だが、その『再認識』に寄稿した著者のうち金一榮・金暎浩・全相仁・朱益鍾は代案教科書の執筆にも参加している。代案教科書の執筆陣は次の通り。
 


이영훈(ソウル大学校経済学部教授)
김재호(全南大学校経済学部教授)
김용직(誠信女子大学校政治外交学科教授)
주익종(落星垈経済研究所研究委員)
김일영(成均館大学校政治外交学科教授)
김영호(誠信女子大学校政治外交学科教授)
김광동(ナラ政策研究院院長)
김세중(延世大学校国際関係学科教授)
김종석(弘益大学校経営学科教授)
전상인(ソウル大学校環境大学院教授)
박호종(ソウル大学校倫理教育科教授)
김영환(『時代精神』編集委員)
 






閔妃批判

この教科書は閔妃を、死後追尊された「明成皇后」ではなく「閔王后」と表記している。さらに次の尹致昊からの引用は、明成皇后ファンを激昂させるだろう。

1894년 8월 7일 윤치호는 영문 일기에서 민왕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녀의 집권기에 걸쳐 그녀의 신조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좋다. 우리 세 사람만 안전하다면야' 였다. 세 사람은 왕과 왕후와 왕자였다. 이 지독한 이기주의는 그에 마땅한 파멸을 몰고 왔다." (p. 34)
1894年8月7日、尹致昊は英文日記で閔王后に対して次のように書いた。「彼女の執権期にわたって彼女の信条は‘どんなことが起こっても良い。われわれ三人だけ安全なら’だった。三人とは王と王后と王子である。この至毒な利己主義は、彼女にふさわしい破滅をもたらした。」 





甲申政変への評価 

 甲申政変(1884)は金玉均ら急進開化派が日本の支援を受けクーデターを起こし、清軍の介入で失敗した事件で、韓国では日本の侵略を促進したと非難する見方が多い。このような視点に対しては、次のように批判している。

반면에 갑신정변을 저평가하면서 그 주역들에게 식민지화의 책임까지 묻는 것은 1880년대 당시 한국을 반식민지 처지로 내몬 것이 일본이 아니라 청이었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p. 40)
一方で甲申政変を低く評価し、その主役たちに植民地化の責任まで問うのは、1880年代当時韓国を半植民地に追い込んだのが日本ではなく清だったという事実を無視する問題点を抱えている。





下関条約の意義

 この教科書は、朝鮮が清から独立できたのは日清戦争での日本の勝利によることを明記している。実態は清の支配から日本の支配に移っただけであることを注記してはいるが、言及すらない他の教科書とは大きな違いである。

청의 패배로 1895년 4월에 체결된 시모노세키(下關)강화조약은 한국이 '완전 무결한 독립자주국' 임을 확인하고, '독립자주'를 손상시키는 청에 대한 조공과 사대 관계를 폐지하도록 규정하였다. 이로써 한국에 대한 청의 종주권은 완전히 폐기되었다. 이 점에서 청일전쟁은 개항 이후에도 청이 유지하고자 했던 동아시아의 전통적 국제질서인 조공체제를 최종적으로 해체하였다. 그렇지만, 한국의 '독립자주'는 청에 대해서만 의미를 가졌다. 청일전쟁 이후 한국은 청을 대신한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p. 47)
清の敗北で1895年4月に締結された下関講和条約は、韓国が「完全無欠な独立自主国」であることを確認し、「独立自主」を損う清に対する朝貢と事大関係を廃止するよう規定した。こうして韓国に対する清の宗主権は完全に廃棄された。この点で、日清戦争は開港以後にも清が維持しようとした東アジアの伝統的国際秩序である朝貢体制を最終的に解体した。しかし韓国の「独立自主」は、清に対してのみ意味を持った。日清戦争以後韓国は、清に代わった日本の支配下に入って行った。
 





伊藤博文暗殺の影響 

 この教科書は、伊藤博文がもともと朝鮮併合に反対だったこと、最終的に賛成に転じたとはいえその暗殺が併合推進派を勢いづかせたことを記し、暗殺が併合の時期を早めたことを示唆している。ちなみに「強占」ではなく「併合」で一貫しているところも、この教科書が親日的という非難を買う一因である。

1906년 대한제국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였다.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두자는 입장을 취했지만, 1909년 4월 통감 사퇴 직전 한국병합 방침에 찬성하였다 (p. 66)
1906年大韓帝国初代統監として赴任した。韓国を日本の保護国として置こうという立場を取ったが、1909年4月の統監辞退直前に韓国併合方針に賛成した。

이후 통감을 사퇴한 이토는 1909년 10월 하얼빈(哈爾濱)에서 동양 평화의 대의를 저버린 죄를 묻는 안중근(安重根)에서 피살되었다. 이후 병합론은 더욱 강화되어 1910년 6월에 도쿄에서 일본 정부와 통감부의 인물로 병합준비위원회가 발족하였다. (pp. 76-77)
以後統監を辞退した伊籐は、1909年10月ハルビン(哈爾濱)で東洋平和の大義を損ねた罪を問う安重根に被殺された。以後併合論はさらに強化され、1910年6月に東京で日本政府と統監府の人物から成る併合準備委員会が発足した。
 






植民地時代の評価

 植民地近代化論は植民地期の明暗両面とも評価しようというものだが、従来の教科書と異なるのは肯定的評価の方であり、そちらが強調される傾向が見られる。

일제의 한국 지배는 한국인의 정치적 권리를 부정한 폭력적 억압 체제였다. 국내외의 한국인들은 불굴의 투쟁으로 독립의 권리를 끝내 쟁취하였다. 그 시기는 억압과 투쟁의 역사 만은아니었다.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p. 78)
日帝の韓国支配は、韓国人の政治的権利を否定した暴力的抑圧体制だった。国内外の韓国人たちは不屈の闘争で独立の権利をついに勝ち取った。その時期は抑圧と闘争の歴史だけではなかった。近代文明を学習し実践することで、近代国民国家を建設し得る「社会的能力」が厚く蓄積された時期でもあった。
 






土地調査事業


 李榮薰らの実証的研究は、従来韓国で信じられて来た「日帝の悪辣な土地収奪」の神話を鮮やかに粉砕してみせた。教育当局は、国史教科書から「土地調査事業によって不法に奪取された土地は全国土の約40%にもなった」という記述をしぶしぶ削除した。しかし現行教科書が収奪史観に拘泥しているのは、上に見たとおりである。これに対し代案教科書は、具体的な数値をあげて収奪史観への挑戦を続けている。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소유권이 사정된 토지는 전국적으로 총 1,910만 7,520필지에 달했다. 그 가운데 소유지의 신고대로 소유권이 사정된 것이 1,900만 1,054필지로 99.5%의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그 반면에 무신고지로 국유지로 편입된 것은 주로 분묘지나 잡종지였는데, 도합 8.94필지 (0.05%) 에 불과하였다. 총독부가 신고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한국 농민에게 신고를 강요하고, 전체 토지의 40%에 달하는 무신고지가 발생하자 국유지로 몰수했다는 기존의 주장은 원래부터 근거가 없는 것이었다. (p. 85)
土地調査事業によって所有権が事情された土地は、全国で総計1,910万7,520筆地に達した。そのうち所有地の申告どおり所有権が査定されたものが1,900万1,054筆地で、99.5%の絶対多数を占めた。その一方で無申告地として国有地に編入されたものは、主に墳墓地や雑種地だったが、合計8,944筆地(0.05%)に過ぎなかった。総督府が申告が何かも知らない韓国農民に申告を強要し、全体の40%に達する無申告地が発生すると国有地として没収したという既存の主張は、元来から根拠がないものだった。
 





米の輸出 

 米の輸出についても具体的な数値をあげ、「日帝が増産分以上の米を奪って行った」とする従来の教科書と真っ向から対立している。また、一人当たり米消費量の減少を収奪の根拠とする見方を否定している。

증산된 쌀의 상당 부분은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1910년대 후반에 비해 1930년대 연평균 쌀 생산량은 700만 석가량 증가했는데, 그 가운데 500만 석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p. 87)
増産された米の相当部分は、日本に輸出された。1910年代後半に比べ1930年代の年平均米生産量は700万石仮量増加したが、そのうち570万石が日本に輸出された。
 


식민지 시기에 한국인의 생활수준이 일제의 수탈로 극도로 열악해졌다고 보는 것이 종래의 통설이었다. 예컨대 생산된 쌀의 절반을 일본에 빼앗고 한국인은 초근목피 (草根木皮) 의 비참한 생활을 강요당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수탈론에는 실증적인 근거가 확실하지 않다는 문제점이 있다. 쌀은 일본에 수탈된 것이 아니라 경제 논리에 따라 일본으로 수출되었으며, 그에 따라 일본인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의 소득은 증가하였다 쌀을 대신해서 만주에서 조와 콩이 대용식품으로 수입되었다. 쌀의 1인당 소비가 감소한 것은 사실이지만, 잡곡 등 대용식품과 기타 가공식품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1인당 열량 섭취가 줄어들었다고는 단언할 수 없다. 생활비 가운데 식료품비의 비중을 나타내는 엥겔계수도 하락하여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개선되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1890~1920년대에 태어난 한국인들의 키가 1~2cm 커진 것도 생활수준의 개선을 의미한다. (p. 98)
植民地時期に韓国人の生活水準が日帝の収奪で極度に劣悪になったと見るのが、従来の通説だった。例えば生産された米の折半を日本に奪われ、韓国人は草根木皮の惨めな生活を強要されたといったものである。このような収奪論には、実証的な根拠が確実でないという問題点がある。米は日本に収奪されたのではなく、経済論理によって日本に輸出され、それによって日本人を包む韓半島全体の所得は増加した。米の代りに満州から粟と豆が代用食品として輸入された。米の1人当り消費が減少したのは事実だが、雑穀等の代用食品とその他の加工食品を総合的に考慮するとき、1人当り熱量摂取が減ったとは断言できない。生活費のうち食料品費の比重を表すエンゲル係数も下落し、人々の生活水準が改善したことを示唆している。1890~1920年代に生まれた韓国人たちの背が1~2cm大きくなったことも、生活水準の改善を意味する。
 





人口の増加

 日本時代の人口増加は生活水準の向上を連想させるためか、他の教科書ではほとんど取り上げられることはない。この教科書では、総督府の保健政策の効果を正当に評価している。

불과 30년 사이에 인구가 50% 넘게 증가한 것은 공중보건과 의료 개선으로 사망률이 낮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유아사망률이 크기 낮아졌다. 전통시대에는 홍역ㆍ 콜레라ㆍ 천연두 등의 전염병이 유행했고, 이것이 기근과 더불어 인구의 증가를 억제하였다. 총독부는 보건위생 업무를 경찰 소관으로 하여 식수와 음식 등 오염원을 관리하고 예방접종에 힘을 써, 전염병의 발생과 전파를 막았다. (p. 95)
わずか30年の間に人口が50%を超えて増加したのは、公衆保健と医療の改善で死亡率が低下したためである。特に乳児死亡率が大きく低下した。伝統時代には紅疫病・コレラ・天然痘等の伝染病が流行し、これが飢饉と相まって人口の増加を抑制した。総督府は保健衛生業務を警察の所管とし、食水と飲食等の汚染源を管理して予防接種に力を入れ、伝染病の発生と伝播を防いだ。
 






植民地工業化 

 欧米の植民地ではあり得ない高度の工業化に対しても、軍需工業だとか不均衡発展だとかいちいち因縁をつけることなく、淡々と記述している。

식민지 한국은 서양 제국주의가 지배한 다른 식민지와 달리 농업 식민지로 고착되지 않고 1920년대 이후 공업이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하는 특징을 보였다. 그것은 한국과 일본이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워 두 시장이 밀접히 통합된 가운데 일본의 과잉자본이 한국으로 건너와 공업에 투자되었기 때문이다. (p. 97)
植民地韓国は、西洋帝国主義が支配した他の植民地とは異なり農業植民地に固着せず、1920年代以後工業が相当な水準に発展する特徴を見せた。それは韓国と日本が地理的にきわめて近く、両市場が密接に統合される中で、日本の過剰資本が韓国に渡って来て工業に投資されたためである。
 







日本方式の評価 

 この他にも日本時代の変化を肯定的に評価している箇所がいくつかあり、反日韓国人の憤怒を買っている。

조선왕조의 임야정책은 공유(公有)의 명분을 내세워 사유림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임야의 사적 관리주체가 없어 산림이 황폐해지는 부작용이 있었다. 이와 달리 총독부의 임야정책은 임야의 사적 관리주체를 창출하여 삼림녹화를 추진하는 방향으로 시행되었다. (p. 86)
朝鮮王朝の林野政策は、公有の名分を掲げ私有林を認めなかったため、林野の私的管理主体がなく山林が荒廃する副作用があった。これと異なり総督府の林野政策は、林野の私的管理主体を創出し森林緑化を推進する方向で施行された。

한국인 지주는 소작농의 관리를 마름에게 맡겨 두고 농사에 적극 관여하지 않는 자들이 많았다. 그에 비해 일본인 지주는 쌀의 생산과 유통 과정을 세밀하게 관리하고 통제하였다. (p. 101)
韓国人地主は小作農の管理を管理人に任せっ放しで、農業に積極関与しない者が多かった。それに比べ日本人地主は、米の生産と流通過程を細密に管理・統制した。

이처럼 한국인에게 가해진 새로운 규율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위한 것들이지만, 근대사회의 규율로서 한국인의 일상생활과 정신문화에 점차 내면화되어 갔다. (p. 104)
このように韓国人に加えられた新しい規律は、日帝の植民地支配のためのものだったが、近代社会の規律として韓国人の日常生活と精神文化に徐々に内面化されて行った。
 






従軍慰安婦

 他の教科書はなるべく従軍慰安婦と女子挺身隊を混同させたいようだが、この教科書はそれらを峻別することを要求している。

해방 후 한국에서는 이 정신대를 일본군의 위안부로 혼동해 왔는데, 이 둘은 정확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p. 92)
解放後韓国ではこの挺身隊を日本軍の慰安婦と混同して来たが、このふたつは正確に区分する必要がある。


 また本文では慰安婦を奴隷労働と規定して日本を非難しているが、資料として「女衒から金を受け取った」という証言を含む日本軍捕虜尋問資料49号(1944)を掲載している。これは慰安婦の強制連行を否定する意図があるらしい。
 


1942년 5월 상순 일본인 대리업자가 '위봉사'를 시킬 한국인 여성을 모집할 목적으로 한국에 도착했다. 이 대리업자가 여인들에게 제시한 것은 큰 돈벌이, 가족의 빚 갚기, 쉬운 일, 신천지 싱가포르에서의 새로운 삶 등이었다. 이러한 꾐에 빠져 많은 여성이 해외 취업에 지원하고, 몇 백 엔의 전대금을 받았다. 이들은 대부분 무지했고 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이었다 (p. 92)
1942年5月上旬、日本人代理業者が「慰安奉仕」をさせる韓国人女性を募集する目的で韓国に到着した。この代理業者が女性たちに提示したのは高額の給与、家族の借金返済、簡単な仕事、新天地シンガポールでの新しい生活等だった。このような誘いに乗って多くの女性が海外就業に志願し、何百円かの前貸金を受けた。これらは大部分無知で教育を受けられなかった女性だった。


 原文は次の箇所にある。翻訳はおおむね正確である。
 


http://www.exordio.com/1939-1945/codex/Documentos/report-49-USA-orig.html

UNITED STATES OFFICE OF WAR INFORMATION
Psychological Warfare Team, Report No. 49.
Place interrogated: Ledo Stockade
Date Interrogated: Aug. 20 - Sept. 10, 1944

Early in May of 1942 Japanese agents arrived in Korea for the purpose of enlisting Korean girls for "comfort service" in newly conquered Japanese territories in Southeast Asia. ... The inducement used by these agents was plenty of money, an opportunity to pay off the family debts, easy work, and the prospect of a new life in a new land, Singapore. On the basis of these false representations many girls enlisted for overseas duty and were rewarded with an advance of a few hundred yen. The majority of the girls were ignorant and uneducated, ...














* **********************************







日本のサヨク共産主義者、アナーキスト ・特亜勢力(シナ共産党工作員、反日韓国朝鮮人、反日なりすまし日本人) は日本を破滅に導く売国奴であり、日本の弱体化、中共への植民地化を進める「日本滅亡推進勢力」であると思われる方はクリックをお願いします 
人気ブログランキングへ悪事千里を走る









Viewing all articles
Browse latest Browse all 3630

Trending Articles